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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참전기
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2016-07-27 (수)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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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大韓民國의 將來를 짊어질 改革과 新進의 主體ㆍ젊은이 들이여!
        
70代 老人의 絶叫 便紙...(퍼온글)
우리 大韓民國의 將來를 짊어질 改革과 新進의 主體ㆍ젊은이 들이여!
여러분들은 60.70대가 겪은 아픔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대들은 조국을 위하여 과연 얼마만큼 땀과 눈물을 흘렸는가?
지금 여러분들이 누리는 풍요로움 뒤에는 지난 날 60.70대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5.16혁명 직후 미국은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을 인정 한다면 아시아 또는 다른 나라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그 때 미국은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존 에프 케네디,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박정희를 만나주지 않았다.
호텔에 돌아와 빈손으로 귀국하려고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 서러워서 한 없는 눈물을 흘렸었다.
가난한 한국에 돈 빌려줄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우리와 같이 분단된 공산국 동독과 대치한 서독에 돈을 빌리려 대사를 파견해서 미국의 방해를 무릅쓰고 1억 4000만 마르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우리는 서독이 필요로 한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혔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이 몰렸다. 그들 중에는 정규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면접 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까 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 거친 손을 만들어 면접에 합격했다. 서독 항공기가 그들을 태우기 위해 온 김포공항에는 간호사와 광부들의 가족 친척들이 흘리는 눈물로 바다가 되어 있었다.
낯선 땅 서독에 도착한 간호사들은 시골병원에 뿔뿔이 흩어졌다. 말도 통하지 않는 여자 간호사들에게 처음 맡겨진 일은 병들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닦는 일이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콜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닦았다. 하루종일 닦고 또 닦았다.
남자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가 넘는 깊은 땅 속에서 그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 캐는 광부 일을 했다. 서독방송ㆍ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여자 간호사와 남자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 할 수 있을까?’ 해서 부쳐진 별명이 ‘코리안 엔젤’이라고 불리었다.
몇 년 뒤 서독 뤼브케 대통령의 초대로 박 대통령이 방문하게 되었다. 그 때 우리에게 대통령 전용기는 상상할 수도 없어 미국의 노스웨스트 항공사와 전세기 계약을 체결했지만 쿠데타군에게 비행기를 빌려 줄 수 없다는 미국 정부의 압력 때문에 그 계약은 일방적으로 취소되었다.
그러나 서독정부는 친절하게도 국빈용 항공기를 우리나라에 보내주었다. 어렵게 서독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을 거리에 시민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코리안 간호사 만세!
코리안 광부 만세!
코리안 엔젤 만세!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박 대통령은 창밖을 보며 감격에 겨워 땡큐! 땡큐! 만을 반복해서 외쳤다. 서독에 도착한 박대통령 일행은 뤼브케 대통령과 함께 광부들을 위로ㆍ격려하기 위해 탄광에 갔다. 고국의 대통령이 온다는 사실에 그들은 500여명이 들어 갈 수 있는 강당에 모여들었다.
박 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이 수행원들과 함께 강당에 들어갔을 때 작업복 입은 광부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대통령의 연설이 있기에 앞서 우리나라 애국가가 흘러 나왔을 때 이들은 목이 메어 애국가를 제대로 부를 수조차 없었다.
대통령이 연설을 했다.
단지 나라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이역만리 타국에 와서 땅속 1000 미터도 더 되는 곳에서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려 가며 힘든 일을 하고 있는 제 나라 광부들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우리 열심히 일 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합시다. 열심히 합시다!’
눈물에 잠긴 목소리로 박 대통령은 계속 일하자는 이 말을 반복했다. 가난한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이역만리 타국 땅 수 천 미터 지하에 내려가 힘들게 고생하는 남자 광부들과 굳어버린 이방인의 시체를 닦으며 힘든 병원일 하고 있는 어린 여자 간호사들 그리고, 고국에서 배곯고 있는 가난한 내 나라 국민들이 생각나서 더 이상 참지 못해 대통령은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이란 귀한 신분도 잊은 채 소리내어 눈물 흘리자 함께 자리하고 있던 광부와 간호사 모두 울면서 영부인 육영수여사 앞으로 몰려나갔다.
어머니! 어머니! 하며 육 여사의 옷을 잡고 울었고 그분의 옷이 찢어 질 정도로 잡고 늘어졌다. 육여사도 함께 울면서 내 자식같이 한 명 한 명 껴안아 주며 ‘조금만 참으세요’라고 위로하고 있었다.
광부들은 뤼브케대통령 앞에 큰절을 하며 울면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주세요. 우리 대통령님을 도와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를 수없이 반복했다.
뤼브케 대통령도 울고 있었다.
연설이 끝나고 강당에서 나오자 미쳐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여러 광부들이 떠나는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붙잡고 ‘우릴 두고 어디가세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 부모님이 보고 싶어요.’ 하며 떠나는 박대통령과 육여사를 놓아 줄 줄을 몰랐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 올라 탄 박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옆에 앉은 뤼브케대통령은 손수건을 직접 주며 ‘우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서독 국민들이 도와드리겠습니다.’ 라고 힘주어 말했다.
서독 국회에서 연설하는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돈 좀 빌려주세요. 한국에 돈 좀 빌려주세요. 여러분들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 할 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로 거짓말 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주세요’를 반복해서 말했다.
당시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다.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 등...
이때, 한국은 76불이었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세계 120개 나라 중에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나라가 바로 우리 한국이었다.
1964년 국민소득 100달러!
이 100달러를 위해 단군 할아버지로부터 무려 4,30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이후 그대들이 말하는 이른바 우리 보수 수구세력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외국에 내다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를 동원하여 ‘머리카락 파세요! 파세요!’ 하며 길게 땋아 늘인 아낙네들의 머리카락을 모았다.
시골에 나이 드신 분들은 서울 간 아들놈 학비 보태주려 머리카락을 잘랐고 먹고 살 쌀을 사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래서 한국의 가발산업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곰 인형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전국에 쥐잡기 운동을 벌렸다.
쥐털로 일명 코리안 밍크를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던지 다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1965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다.
세계가 놀랐다.
‘저 거지들이 1억 달러를 수출 해?’하며 “한강의 기적”이라고 전 세계가 경이적인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조국근대화”의 점화는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와 광부들이었다.
여기에 월남전 파병은 우리 경제 회생의 기폭제가 되었다.
참전용사들의 참전 수당 일부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한반도에 동맥이 힘차게 흐르기 시작됐다.
우리가 올림픽을 개최하고 월드컵을 개최하고 세계가 우리 한국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국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대들이 수구 보수세력으로 폄훼하는 그 때 그 광부와 간호사들 월남전세대가 바로 모두 60ㆍ70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아니었던가?
그 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명심할 것은 그 때 이방인의 시신을 닦든 간호사와 수 천미터 지하탄광에서 땀흘리며 일한 우리의 광부, 목숨을 담보로 이국전선에서 피를 흘리는 우리 국군장병...
작열하는 사막의 중동 건설현장에서 일한 60,70대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그대들 젊은 세대들이 오늘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반전과 평화 데모를 외치며 거리로 몰려나와 교통질서를 마비시키는 그대들이 과연 그렇게 고생한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를 수구세력으로 폄훼 할 자격이 있는가? 입이 있고 양식이 있으면 말을 좀 해보시라오!
그대들이 그때 땀흘리며 일한 오늘의 6ㆍ70대들을 보수 수구세력으로 폄훼하기에 앞서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라. 국가 경영을 세계와 미래라는 큰 틀 전체로 볼 줄 아는 혜안을 지녀야 하지 않겠는가?
국내에서 월 6ㆍ7백만원을 받는 근로자들이 노사분규나 일으키고 허구헌 날 종묘공원이다 대학로에 모여 반정부데모를하여 교통질서를 마비시키는 일보다는 저 넓은 세계로 태평양 대서양 건너로 눈을 돌려야 한다.
200여개국들과 싸워야한다.
우리 6ㆍ70대는 굶주린 배를 움켜지고 보다 나은 내일의 삶을 위해 서독에서 중동에서 월남에서정말 피눈물 나는 고통을 참고 견디어 왔다. 또다시 한번 오늘의 고통을 즐겨 참고 견뎌 국민소득 4만불대의 고지달성 때 까지는 앞만 보고 달리는 자동차와 같이 우리들 신ㆍ구세대는 한 덩어리가 되어 뭉쳐야한다 폄훼할 시간이 없다 이번 “FTA” 협상을 보지 않았던가.
강대국들의 힁포...
이제 갈라져 반목하고 갈등하기에는 갈 길이 너무 멀다.
이제 우리 모두한 번쯤 자신을 돌아보며 같은 뿌리에 난 상생의 관계임을 확인하고 다시 한 번 뭉쳐야한다.
우리 모두 선배를 원로를, 지도자를 존경하고 따르며 우리 모두 후배들을 격려하고 베풀고 이해 해주면서 함께 가보자. 이제 우리들은 지난 날의 보리고개 일제 36년간의 서러움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上敬下愛[상경하애]의 마음가지고 전진 또 전진합시다. 우리 대한민국의 앞날에 만년 2만년의.....영원히 더욱 밝은 빛이 비추어 지리니!!
내 나이 66세. 나는 광부로 못 갔지만 내 친구는 그 당시 독일에 광부로가서 독일 여자와 결혼하여 그곳에 살고 있다. 몇 번을 접했지만 언제 보아도 감동이 밀려오는 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풍요로움이 그 분들의 희생과 수고가 있었기에 가능하기에 돌아가신 나라님 박대통령님을 비롯한 60ㆍ70대 ! 그 분들께 고개숙여 감사함을 전합니다.
제나이 27세, 1965년도 육군 중위로 채명신사령관님을 모시고 최초 월남전투에 참가 “하루 3불” 한달에 105불을 벌어 보겠다고 부모형제 처자식 멀리 두고 월남전쟁에 참가, 3년간을 싸웠습니다. 수당 105불중 10불만 쓰고, 나머지는 모두 고국으로 “채명신”사령관님의 명에 의! 송금 되었습니다.
조국에 딸라가 있어야 조국을 건설한다는 사령관님의 그 애국심 그때 39세의 젊으신 육군 중장이신 사령관님께서도 세월을 이길수 없어 어느듯 82세의 노인으로 그래 ~ 그래 정말 힘들었습니다. 고국이 그리웠습니다.
전쟁 참으로 처참하고 비참 했습니다.
저는 전쟁에서 폐를 잃었습니다. 우측폐 반이 없습니다.
정말 전쟁 몸서리 쳐집니다. 병고의 통한의 고통 어찌 말로 표현하리요. 그러나 오늘날 이렇게라도 살고 있으니, 행복인줄 알고 살아갑니다.
상이군경, 국가유공자 자랑스럽습니다.
이제 70을 바라보는 황혼의 인생이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몸은 늙어 황혼이 되었으나 우리들의 고생으로 우리들의 아들딸들 손자손녀들이 우리들과 같은 고생하지 않고 마음 놓고, 사는 조국을 바라볼 때
苦盡甘來[고진감래]의 사자성어[四字成語]가 생각납니다.
우리 모두들 사랑하면서 정말 잘사는 조국 대한민국을 만들어 봅시다. 하나님은 우리편입니다. 읽어주셔 감사합니다.
우리님들 모두 오늘 보다 더 좋은 내일을 만듭시다.
오늘도 건강한 하루 되소서...
*(제공:대한민국 ROTC 구국 연합 조 웅 기)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미 대통령이 만나주지 않았다의 반론,


"5·16 군사 정변은 헌정을 중단시킨 쿠데타였다. 하지만 반공과 함께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강조하였다. 대통령 윤보선은 쿠데타를 인정하였다. 육사 생도도 지지 시위를 하였다. 미국은 곧바로 정권을 인정하였다." (324쪽)

]


역사왜곡과 독재미화 논란을 빚었던 교학사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럼 미국은 정말 박정희 정권을 인정했을까요? 민족문제연구소는 "5·16 군사 쿠데타를 미화하는 표현이다. 미국이 곧바로 승인했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반공과 동맹국과의 유대를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희생도 불가피하다는 것인데, 이런 서술은 학생들의 가치관에 큰 혼란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참고 2013.12.18 <프레시안> 교학사교과서, 5·18 유혈사태가 시민 탓?)



1970년대 미 중앙정보국 한국지부 총 책임자와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주한 미국 대사를 지낸 도날드 그레그는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박정희 군사반란에 대한 미국 판단을 이렇게 말합니다.

"(쿠데타 당시) 미 정부 안에서 두 가지 반응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장면 정부가 (1960년 정권교체 이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점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국방성을 중심으로 박정희가 반공 군부 지도자라는 점에서 북한으로부터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다고 본다." 2011.05.12 <한겨레> "박정희 1972년 핵개발 착수…1977년 포기했다" 



특히 '미국이 박정희를 좋아했다는 뜻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좋아했다기보단, 받아들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당시 미국의 외교정책은 냉전의 관점에서 해당 국가의 국내정책을 바라봤다. 정부의 방향이 공산주의냐, 반공이냐 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어떤 나라에서 누군가가 정권을 장악했다고 할 때, (그 정부가 반공주의 정부라면) 오케이다. 한국의 경우, 당시 장면 정부는 강력하지 않았고, 매우 강력한 반공주의자에 의해 정권이 교체됐다. 미국이 새 지도자와 싸울 필요가 없다. 그가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돕자는 게 당시 미국의 결정이라고 봐야 한다."



이 같은 판단은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 미국 상황 때문입니다. 박정희가 군사반란을 일으키기 한 달 전인 4월 17일 미국은 쿠바 피그만 침공 실패로 한반도에서 일어난 쿠데타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비록 박정희가 '좌익경력'은 있었지만, 반공을 들고 나왔기 때문에 반대할 명분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터집니다. 케네디가 한국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박정희로서는 정말 하늘이 내린 기회였던 셈입니다.

▲박정희와 케네디. 케네디는 박정희에게 민정이양을 요구했다. 이는 리영희 선생 특종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케네디는 군사반란은 상황 때문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를 제대로 대접은 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는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합니다. 52년이 지난 2013년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자 우리 언론들은 박정희-케네디 인연을 집중 보도했습니다.



지난 1961년, 미 백악관을 방문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케네디 대통령과 박 의장이 처음 만나는 이 순간에 두 나라 지도자들의 우의와 신뢰에 찬 악수는 두 나라의 굳은 유대를 상징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흔들의자를 앞뒤로 움직이는가 하면, 한 손을 양복 주머니에 넣고 다소 거만한 자세로 악수를 합니다(중략) 52년이 지난 뒤,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 같은 장소에서 '블랙 케네디'로 불리는 오바마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을 갖습니다.-2013.05.05 <mbn>아버지에 이어 52년 뒤 딸의 방미…확 달라진 미국의 대우



박정희-케네디 회담과 박근혜-오바마 회담은 반세기의 세월의 변화만큼이나 그 격이나 내용을 달리합니다. 1인당 국민총생산이 고작 80달러에 불과했던 가난했던 그 시절, 미국으로 건너간 박정희 대통령은 원조을 요청했지만 케네디로부터 매몰찬 거절을 당했습니다. 쓸쓸하게 귀국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하지만 1인당 국민총생산 3만불을 향해 달리는 지금. 박근혜 대통령은 오바마 회담에서 한미 양국이 글로벌 파트너로 우뚝 서는 한미동맹 60주년 동맹선언을 채택합니다-2013.05.05 <연합뉴스> 박정희·케네디 52년 후 박근혜·'블랙 케네디' 회담



아버지 박정희는 약소국 최고지도자로서 설움을 당했지만, 딸 박근혜는 대접을 제대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언론은 케네디가 거만하고, 원조를 거부한 것만 보도했지만 당시 케네디는 박정희에게 '민정이양'을 요구했습니다. 케네디가 민정이양을 요구하기 전 박정희는 군사반란 후 '혁명공약'에서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며 스스로 민정이양을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가 민정이양을 하지 않은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케네디가 박정희에게 민정이양을 요구한 사실은 고 리영희 선생 특종입니다. 리영희 선생은 당시 <합동통신> 기자였습니다. 지금도 별 다르지 않지만, 당시 우리 언론들도 '박정희-케네디 회담' 결과를 두고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승인했다고 전했지만, 리영희는 케네디가 조속한 민정이양과 군의 원대복귀 따위를 제시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케네디는 박정희에 대해서 ① 조속한 시일 내에 공정한 선거를 통한 민정으로 이양할 것 ② 민정이양에 앞서는 군의 정치관여 금지와 원대복귀 ③ 그때까지 모든 경제원조의 집행연기 ④ 군사원조의 잠정적 동결 ⑤ 박정희가 제1차 경제계획으로 요구한 공업화계획 자원 23억 달러 요구의 백지화 ⑥ 조속한 한일 회담 재개를 통하여 단시일내의 한일국교정상화 실현 ⑦ 베트남사태에 대한 남한의 협력 등을 요구한 거예요. 그중에서도 조속한 민정이양, 군의 원대복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서 한일회담 재개를 통한 조속한 한일국교 정상화 실현이었어요." 리영희 <대화>(한길사) 277쪽



이하 생략

 
 
이름아이콘 김경만
2016-07-30 21:19
파독 광부들의 급여를 담보로 돈을 빌려온 것은 아닙니다. 광부중 한사람이 뤼브케 서독 대통령께 건의한 사실은 있습니다만 급여를 담보로 돈을 빌려준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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